[기고] 한인 독립운동가 김종림 재평가 필요하다
2023년은 미주 한인 이민 120주년이자, 한국 공군의 상징적 기원이 되는 캘리포니아 소재 ‘윌로우스 비행학교’ 설립 103주년이 되는 해다. 미주 한인 독립운동가 가운데 도산 안창호,노백린,박희성,이용근 선생 등은 잘 알려져 있지만 윌로우스 비행학교 설립에 전폭적인 재정지원을 했던 김종림 선생의 생애는 잘 알려지지 않았다. 쌀농사로 부를 축적한 그의 재정 지원이 있었기에 비행학교 설립도 가능했다. 그런데 1920년 4월 문을 열었던 비행학교는 얼마 되지 않아 불운을 겪게 된다. 이맘때 쯤인 그해 11월 초 윌로우스 지역에 100년 만의 폭우가 쏟아지면서 후원자인 김종림의 쌀농사가 큰 타격을 입었기 때문이다. 막대한 자금이 필요한 비행학교 재정 지원에 어려움이 생긴 것이다. 김종림(1886~1973)은 대한인국민회,북미지방동지회 등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다. 하와이로 이민 와 1907년 샌프란시스코로 이주했으며, 이후 유타주 솔트레이크시에서 철도 건설 노동자로도 일했다. 당시 공립협회에 가입했고 다시 캘리포니아주의 바실리아, 프레즈노,리들리 등에서 노동자로 일했다. 1908년 전명운, 장인환 의사의 스티븐슨 저격 의거가 일어나자 직접 공립신보 인쇄원이 되어 동포 사회에 이 소식을 알리기도 했다. 1909년 샌프란시스코로 이주 후엔 ‘대한인국민회’에서 활동했다. 대한인국민회는 1909년 2월1일 샌프란시스코에서 안창호,박용만,이승만 등에 의해 창설된 미국 최대 독립운동 단체였다. 지난 2004년에는 기념재단이 출범해 지금도 선조들의 독립정신과 나라 사랑의 마음을 차세대에게 알리고 있다. 그는 1912년 무렵 프린스톤에서 벼농사를 시작했고 이후 윌로우스 지역으로 확대했다. 1914-1916년까지 계속된 풍년과 제1차 세계대전으로 인한 전쟁 특수로 인해 쌀값이 폭등하면서 김종림은 ‘쌀의 대왕’으로 불리우며 한인 최초의 백만장자 명성을 얻었다. 자연히 그는 지역사회 독립운동의 중심이 되었다. 1920년 초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독립전쟁의 해’를 선포하고 비행대 편성의 방침을 세웠다. 이 소식을 접한 김종림은 1920년 초 노백린 임시정부 군무총장을 만나면서 자신의 일생에서 가장 중요한 업적이자 한국 독립운동사에 길이 남을 결정을 내린다. 공군 양성 계획에 흔쾌히 동참해 설립 자금 2만 달러와 월 3000달러의 운영비를 지원했다. 그해 6월에는 실제로 비행기 2대를 구입해 비행 실습훈련까지 했다. 하지만 앞서 언급한 것처럼 100년 만의 폭우로 쌀농사가 실패하면서 재정 지원에 차질이 생겼고 비행학교는 결국 문을 닫게 된다. 비록 짧은 기간 이었지만 윌로우스 비행학교는 조국 독립을 위한 가장 획기적인 발상과 실천을 한 것이었다 당시 공군을 양성해 일본군을 공격한다는 것은 다소 비현실적인 방법으로도 생각된다. 그러나 조국독립이라는 목표를 세우고 용기 있게 행동으로 옮긴 선조들의 노력은 후손들에게 큰 자부심으로 기억된다. 사재를 털어 윌로우스 비행학교를 지원한 애국지사 김종림, 그리고 비행기 조종사가 되기 위해 죽음을 각오했던 대담하고 진취적인 조선 청년들의 기상에 우리는 감동하지 않을 수 없다. 특기할 만한 점은 김종림은 주로 재정 지원을 담당하며 안창호계와 이승만계 양쪽 진영 모두에서 활약한 애국지사라는 점이다. 그의 목표는 오로지 조국의 독립이었으며, 어떤 경우에도 이를 포기하지 않고 행동함으로써 한인 사회에 희망을 주는 삶이었다. 조국의 독립을 위해 열정을 다한 그의 애국적 삶에 존경을 표하며, 그의 업적과 삶에 대해 좀더 적극적인 평가가 있어야 할 것이다. 심인태 / 공군전우회 LA지회장기고 독립운동가 김종림 김종림 선생 비행학교 재정 비행학교 설립